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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원 덕 희- 떠나온 시간, 추억에 대하여
2014년 09월 13일 [의성군민신문]

ⓒ 의성군민신문
자식을 낳자마자 잡아 먹는 신이 있었다. 한 손에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낫을 들었고 다른 손에는 모래시계를 든 이 비정한 신은 크로노스, 시간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크로노스가 자식을 낳자마자 잡아 먹는 이유는 자식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각별한 보호로 한 자식이 태어난다. 아들을 숨기고 대신 돌덩이를 크로노스에게 주어 살린다. 바로 제우스 신이다. 제우스는 장성하여 아버지를 죽인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죽음으로 시간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시작이 있는 모든 것에 끝이 있게 되었고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도 없으며 신을 제외하고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게 되었다. 이후부터 태어나자 마자 죽음을 향해 가는 거역할 수 없는 물리적 소멸의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한다. 크로노스의 저주로 인하여 우리의 존재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반드시 사라지게 되었다.
 
비바람 치던 밤. 어린 시절 그런 밤이면 아버지와 나는 안테나를 매단 녹슬고 늙은 장대에 매달렸다. 전파가 비바람에 휩쓸려 미친 듯이 춤을 추면 레슬링 경기를 흔들어 놓았고 그럴 때면 우리의 김일 선수는 늘 반칙을 당하며 휘청거렸다. 하지만 다시 우리의 영웅이 링을 박차고 일어나 힘껏 이마를 받을 때마다 함성을 질러대며 우리는 그렇게 비바람을 건너고 있었다. 큰 길이 낳은 수많은 샛길 끝에는 언제나 허파 꽈리 같은 집들이 매달려 있었다. 산동네 올망졸망 붙어 사는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집, 옥수수 꽃 말갛게 피는 울타리 옆 담을 돌아 땀냄새 먼지 투성이 아버지 작업복이 걸어 들면 흰 수건 질끈 동여맨 엄마도 꽃무늬 뽀뿌린 치마 펄럭이며 대문으로 걸어 든다. 누렁이 뒹구는 마당 한쪽 평상엔 자작하게 끓인 빡빡이장 한 종지와 찐 호박 잎, 새곰하게 익은 열무 김치와 흰 밥에 배춧국 한 사발 밥상 둥글게 차려 진다.
추억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가장 그리운 풍경은 빛과 색으로 안기는 고향의 향기다. 고향은 누구를 미워하지도 누굴 내치지도 않는다. 고향은 오로지 버리지 않고 잊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고 마음으로 안고 기억한다. 우리 엄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 아버지 등에는 땀 이 흘렀다. 엄마는 세월에 젊음을 묻고 아버지는 시간의 끝으로 떠나셨다. 한이 깊은 만큼 사랑도 깊지만 세월이 그렇게 많이 가버렸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세월은 나의 엄마, 나의 아버지와 함께 갔다. 그 세월 속에 쭈글쭈글해진 얼굴을 사랑한다. 아, 나도 동여 맨 신발 끈 풀고 어깨 짐 내려 엄마, 아버지 마주 앉은 그 세월로 돌아가 모깃불 피우고 된장찌개 바글바글 끓는 저녁을 한 술 뜨고 싶다. 너무 익숙해서 편안하기만 했던 고향이라 부르는 그 곳. 그 옛날 손때 묻어 자주 여닫던 대문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사십여 년 만에 대문 열고 들어 선다. 세월을 훌쩍 넘은 대문을 다시 나올 때는 잊혀진 추억을 데리고 눈도 손도 젖어 나온다.
시간은 잊혀져도 추억은 새로운가 보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희미해 진다고. 그러나 슬퍼한 적 없는 슬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쑥 찾아 온다. 누구는 그것을 자기 연민이라고 한다. 나는 그러기엔 너무 오래 지나왔다. 모자이크라도 한 것처럼 시간의 순서도 없이 채워져 있던 액자 테두리는 세월의 흔적으로 본래의 흰색이 사라져 있었다. 시간이 뒤범벅인 세월은 서로 너무 닮아 있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흑백사진 옆에는 아들의 흑백 돌 사진이 나란히 있어 그게 한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분간이 안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미 떠났고 내 앨범은 시간의 추억만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게 추억들은 언제나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 온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은 아무리 멀어도 좋다. 돌아갈 곳이 없는 기억들은 결코 추억이 되지 못한다. 돌이킬 수 있는 기억은 마음속 어딘가에 편안한 공간을 찾고 천천히 바래가는 추억이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할 것이다. 내 추억의 사진들은 반 세월 넘게 나와 같이 다녔다.
 
사진가  원 덕 희
 
의성군민신문 기자  muk45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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