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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오효원 여사의 가치와 의성의 의미
의성군민신문 기자 / muk4569@naver.com입력 : 2016년 06월 20일(월) 00:49
ⓒ 의성군민신문
한성(漢城) 회고(懷古)                                                                               
오효원 지음
삼천리 금수강산은 백왕(百王)의 기전(畿甸)인데 
잎 떨어진 쓸쓸한 천지에 자주색 무궁화가 날리네. 
초(楚) 나라의 분요(氛妖)로 남쪽 대궐이 어둑하고 
진(秦) 천지의 살기(殺氣)로 북극성(北極星)이 희미하네. 
가을바람에 패상(㶚上)에는 황룡(黃龍)이 떠나가고 
지는 햇살에 함양(咸陽)에는 백마(白馬)가 돌아가네. 
지난 일은 아득하여 물어 볼 곳이 없는데 
덧없이 돌 해치(獬豸)만 남아서 궁궐 문을 지키네. 

三千錦繡百王畿 搖落乾坤紫槿飛 
楚國氛妖南闕暗 秦天殺氣北辰微 
秋風㶚上黃龍去 落日咸陽白馬歸 
徃事茫茫無問處 空留石獬守宮闈 

기전(畿甸): 기내(畿內).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까운 행정구역의 안. 
분요(氛妖): 요기(妖氣), 요사스러운 기운으로 재화(災禍)나 반적(叛賊)을 비유함. 
패상(㶚上):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패수(覇水)의 물가. 여기에서는 한강(漢江)을 가리킴. 
함양(咸陽): 중국 섬서성(陝西省) 중앙부 위수(渭水)의 북쪽 연안에 있는 도시. 전국 시대 진(秦) 나라의 도읍(都邑). 여기에서는 한양(漢陽), 곧 서울을 가리킴. 
해치(獬豸): 해태.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                               
                                  역시 울산대 국문과 성범중 교수

오효원은 조선 최후의 여류 한시인이다.

그녀는 의성에서 태어나 아버지 오시선의 배려로 남장하여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으며 글을 배운 지 불과 몇 달만인 9살 때에 한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 후로도 의성과 의흥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는 등 한시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14세때 감옥에 갖힌 아버지를 구하러 서울에 올라가 판서대감에게 읍소 아버지를 구했으며 이로인해 시문학 모임인 구로회에 참여하게 됐다.      
20세 초반 여성들의 교육에 뜻을 두고 이등박문에게서 추천서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모금운동을 벌여 그 자금으로 명신조선여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초대교장인 신해영씨와 약혼했으나 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한동안 충격을 받았지만   20대 후반 중국으로 건너가 당시대 저명한 중국문인들과 한시를 교류하기도 했다.
오효원이란 이름은 원래 오덕원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지극한 효심으로 효원 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호 소파란 작은 소동파란  뜻으로 당시 오효원 여사가 얼마나 천재적 한시가였던가를 잘 알려주고 있다.의성에서 태어나 소파여사시집 단한권을 남긴 오효원 여사는 문학적 가치뿐 아니라 교육에서 소외된 당시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젊디 젊은 나이에  학교를 세운 깨어있는  선각자이기도 했다.
반면 여사의 일생은 불우했다. 시대의 아픔이 시인의 감수성에 반영돼듯이‘곡 신해영씨’라는 시에서 여사는 정인을 잃고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된다. 
여사의 30대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육신의 병을 얻어 40전후 요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오효원 여사의 유작시 중 일제하의 서글픈 현실을 노래한 시가 해석됨에 따라 새롭게 그녀가 재조명되고 있다.  
또한 의성의 정신적 유산으로도 손색이 없는 소파여사의 행적이 밝혀짐에 따라 본지는 해주 오씨 종친회를 비롯 지금까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취재 지면에 싣게 됐다.

 1. 소파 오효원 여사의 문학적 가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청구영언에 실린 야은 길재의 시조이다. 망국 고려의 한을 표현한 이 시조는 그 사상적 색깔이 조선에 저항한 시로 평가 받는다. 그가 인동 선산 등에 조용히 칩거하면서 후학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다. 이 시조와  본지 1면에 소개된 소파 오효원의‘한성 회고’는 미묘하게 그 뉘앙스가 닮아 있다.‘한성 회고’는 3수의 한시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한시는 더욱 왕조의 몰락에 대해 통한을 자아내게 한다.

만리에 펼쳐진 슬픈 가을이 황제의 기전에 들어오니
상림에는 꽃이 져서 옥계단에 날리네.

..중략
산새는 석양 속에 세 번을 울고 떠나가는데
벼슬없는 선비는 천 년에 한번 읊고 돌아가네.
근심 속에 가무를 듣던 궁중여인은
세상에 흩어져 옛 궁궐을 이야기하네.

       역시 울산대 국문과 성범중 교수

오효원의 한시 그대로를 보면 조선시대 여류 한시인의 주제가 되던 사모곡이나 남녀상열지사를 한참 뛰어넘어 있다. 오효원의 문학적 가치는 일상의 일기체에서부터 시대의 아픔까지 주제의 확장과 여성이면서도 매우 남성적 필체로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아래 오동잎 다 지고
서리 속에 국화는 누렇게 변했네
...중략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한 뒤에
정은 푸른물결과 더불어 길어질 것이네.

황진이가 소세양과 이별을 앞두고 지은 한시이다. 조선시대 여류 한시인들은 신분이 첩이거나 기녀인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정치적이거나 시대적 주제를 표현하기 어려웠다. 신 사임당의‘천리가산 만첩봉’으로 시작되는 한시도 늙으신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효의 유교적 주제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여류 한시인들은 그 주제에 신분적 혹은 남녀차별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었다. 그에 반해 소파 오효원의 시는 그 문학적 가치에 있어 시대와 우국을 표현하던 남성적 한시까지 시도한 비범함을 가지고 있다.

2. 소파 오효원 여사의 시대적 가치

소파여사는 1889년 3월, 의성읍 도서리에서 출생했다. 지금의 군청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아버지 오시선은 지금의 부군수 쯤 되는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소파 여사는 원래 이름이 덕원이었다. 아버지가 뜻 밖의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당시 14세의 오덕원 여식은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홀로 상경하게 된다. 아버지의 죄를 대신하게 해 달라는 읍소를 듣던 유하 김종한 판서는 덕원의 효심과 식견을 보고 부녀지간의 결의를 맺고 당대의 한시회에 입문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오시선이 덕원의 효행으로 풀려나고 그 후 그녀의 효행과 한시의 재능이 알려지면서 오효원이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九歲入學後作(구세입학후작)
國俗自何時(국속자하시) 나라의 풍속이 어느 때부터
重男不重女(중남부중녀) 남자는 중히 여기고 여자는 중히 여기지 않았는가
一篇千字文(일편천자문) 한 편의 천자문을
九歲學於序(구세학어서) 아홉 살에 서당에서 겨우 배웠네

오효원 [吳孝媛]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 3. 25., 국학자료원)

ⓒ 의성군민신문
오효원 여사가 9세에 지었다는 한시이다. 효원은 여자들이 공인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동창인 남학생들에 비해 뛰어났음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우수한 작시 능력으로 그는 이듬해인 열 살에 의성과 의흥 양 읍의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소파 오효원 여사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성장기를 거쳤으며 일제강점시대 성인으로 사회를 딛은 격변기의 여성이었다. 
한시라는 시대적으로 구학에 속하는 재능을 지니고 나왔지만 여성교육의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당시 최고 권력자이자 일제의 원흉인 이등박문의 도움까지 받았다. 
요즘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친일이라든가 항일이라든가의 개념이 자리잡힌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그 시대의 오효원 여사를 그런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된다. 문학적 친일이라 함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고 나서도 참전종용이나 일제미화의 글을 쓰고 그에 따라 일본을 돕는 적극적 행위가 수반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지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지 않았다고 모두 친일이라는 칼을 씌우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파 오효원 여사는 앞서 말한‘한성회고’라는 시에 망국의 한을 담아 발표한 시가 있고 당시 이 정도의 시를 발표하는 것은 일제의 심문이나 취조를 받을만한 저항시였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소파여사는 여성들의 교육기회나 참여에 헌신한 선각자였다. 그녀는 스무 살 어린 나이에 탁월한 한시 재능을 사용해 무일푼 혈혈단신으로 여성교육기관을 만들려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녀의 한시는 일본 문인들의 협조로 모금운동으로 까지 성장했다. 
여사가 신해영과의 혼약을 기다리다가 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세상 끝의 슬픔을 느꼈을 때에도 마지막에 그녀를 다시 찾게 해준 것은 한시와 여성교육이었다. 여사는 교편을 잡으며 마음을 다잡았고 20대 후반 중국으로 건너가 양계초, 김남헌, 모상수, 반란사 등 저명한 중국 문인들과 한시를 읊으며 교류했다. 그 후 여사는 병을 얻고 아버지 오시선에게 소파시집을 발간하도록 하였지만 마지막 생을 어떻게 마감하였는 지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성교육의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20대 황금기를 여느 여성들과는 달리 여성의 학교교육을 위해 동분서주 하였으며 정인이자 교육사업의 정신적 동지였던 신해영을 잃고 깊은 슬픔을 느끼던 한 여성이였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한시의 본산인 중국 문인들에게서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한시가였다.
그리고 여사는 조선시대 마지막 여류시인이며 김천의 송설당 최씨와 더불어 교육사업에 투신한 시대적으로 깨어있는 열혈여성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파여사의 시가 오늘날 완전히 보존되어 있는 것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 의성군민신문

3. 소파 오효원 여사와 의성의 의미

지난 6월 1일 의성군의 공무원 특강에서는 시사저널 대표인 권대우 회장이 소파 오효원 여사의‘소파여사시집’을 들고 의성을 찾아왔다. 소파 오효원여사의‘소파여사시집’이 여러 국문학 논문에 발표되고 신문지면에 간간히 소개되어 왔지만 자료가 워낙 부족해 좀 더 심층적으로 다뤄지기 힘든 사안으로 여겨져 왔다.
의성 다인면 출신인 권대우 회장은 사적으로 그간 소파여사의 시집을 계속 추적해 오다가 최근 서울 은평구의 작은 고서점 가게에서 폐지로 분류되던 한 뭉치의 잡지 속에서 소파여사의 시집을 발견하게 됐다. 
그 후 권 대표는 지인을 통해 소파여사 시를 해석하다가‘한성회고’라는 시를 통해 여사의 한을 발견하고 의성의 새로운 인물임을 홍보하고자 기꺼이 특강을 하고, 발견한‘소파여사시집’을 의성군에 기부했다.
지난 6월 14일 본지는 소파여사의 족보를 쫓아 해주 오씨의 종가에  연락하였고 뜻 밖에 여사를 생전에 만난 적이 있는 분을 소개 받았다. 소파 여사의 족친인 오상활(86세)옹은 오탁근 전 장관의 고모가 소파 오효원 여사임을 확인 시켜 주었고 족보책에 쓰인 오효원 여사와 아버지 오시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본지는 자료가 정리되는 대로 관계 사진을 올릴 것을 약속드리며 우선 오효원 여사를 소개한 한국일보 기사를 스크랩한 사진을 싣는다.
소파 여사와 의성의 의미에 앞서 우선 획기적 방법으로 여사를 교육케한 아버지 오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여성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관습에 철저히 폐쇄된 사회였다. 
오시선은 어릴 적부터 남자같은 행동을 보인 여식 덕원을 남장을 하게 하여 오빠와 함께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킨 지혜가 바탕에 있었다. 당시는 여성을 교육할 아무런 기관이 없었으므로 비록 양반의 자제는 독선생을 두어 한자를 배울 기회는 있었지만 여성들은 언문이라 비하하는 한글정도를 깨치거나 어깨너머로 천자문 정도를 때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일반여성들은 아예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 여식에게 특별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 아버지의 속 뜻은 남녀의 구분없는 교육기회를 생각지 않았다고 볼 수가 없다. 즉 아버지 오시선이 이미 상당히 여성교육에 대해 열려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오효원 여사는 14세 때 아버지의 허물을 덮고자 자신이 아버지의 죄를 대신 받겠다고 나섰다. 이 때 여사가 홀로 상경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점이다. 14세 소녀가 교통이 제대로 없던 시절에 아버지를 위하여 홀로 상경하는 일이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그 위에 집정문을 두드려 읍소하는 말이 얼마나 절실하였으면 판서가 부녀지간을 맺고 아비의 죄를 사할 방법을 찾아 주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여사는 분명 여기 이 작은 의성에서 태어나고 의성에서 자란 인물이지만 그녀의 학식과 용기는 14세에 이미 일국의 법관을 움직일 만한 틀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무모한 용기이거나 우물 안의 학문적 소양이었다면 그래서 과대포장 되었다면 오히려 부녀지간의 결의를 한 판서 김종한은 국법을 경시한 죄로 탄핵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므로 여사의 강한 행동과 학문적 깊이는 지행일치하고 있으며 이는 무기력하고 이율배반적인 남성 위주의 유교사회에 대한 비판의 반증이기도 하다. 
이미 백년도 지난 이 고장 출신 소파여사의 일이지만 여전히 남성 위주의 의식이 지배하며 유교 근본주의가 큰소리하는 의성에 새로운 각성제가 될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은 소동파란 뜻이 담긴 소파라는 호에서 여사의 시적 재능을 보여준다면 효원이라는 이름에서 그 덕행이 배운 학문과 행위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성은 소파 오효원 여사가 태어나고 그 아버지가 세상의 편견을 뚫고 여성교육을 받게 한 여사의 학문적 모토이다. 의성이 소파 오효원 여사라는 대담한 여성을 낳고 기른 고장이라면 이제는 제2의, 제3의 소파 오효원의 탄생이라는 밑거름을 만들 준비를 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판단된다. 

의성군민신문 기자  muk45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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