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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대가 만난사람 - 효선농산 대표 김정희(49)
잡초라 부르는 것조차 모두 아름답다!
의성군민신문 기자 / muk4569@naver.com입력 : 2014년 12월 02일(화) 21:17
ⓒ 의성군민신문
가공업에 종사하시는 분을 종대가 만난 사람 여섯 번째 주인공으로 모시기 위해 한분께 전화를 드렸지만 인연이 되지 않았다. 어떤 분을 모셔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효선농산 김정희 대표님께서 마을사업에 대한 조언을부탁한다며 시간 날 때 마을에 한번 방문해 달라는 전화가 마침 왔다. 순간 잔머리가 돌았다. 마을에 들리는 길에 효선농산 취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좋다고 하셔서 이번호에 모시게 되었다. 자문과 인터뷰 두 가지 일을 보기위해 춘산면 효선리에 들리는 날 산수유 열매들이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새빨간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야채효소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과 과수원 3천 평을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인분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인분의 영양분이 좋아서인지 쑥, 민들레, 돌나물들이 너무 잘 자라요. 예초기가 없던 시절이라 낫으로 일일이 베야했는데 끝이 안 보이는 풀과의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시어른께서 일본 애농회와 교류를 하며 받아보는 농사잡지책에 있는 야채효소의 정보를 접하시고는 과수원에 자라는 풀로 야채효소를 만들어 보자고 하셔서 항아리 하나에 실험적으로 만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집에 오시는 손님들께 이 물을 대접하니 너도 나도 맛있다며 팔라고 해서 조금씩 판매를 하자 항아리도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야채효소가 다이어트 음료로 알려지면서 일본에서 수입하여 판매되었는데 가격이 무려 1리터에 15만원 정도였습니다. 야채효소를 만드는 정농회 회원 농가가 늘어나면서 누군가가 허가를 받지 않고 판매를 하면 문제가 된다는 말을 하여 군청에 확인을 해보니 식품위생법에 저촉되는 판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허가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지원 사업을 알게 되어 1996년 지원금 80%, 자부담 20% 총 1억 2천만원의 사업비로 야채효소 제조 공장 효선농산을 세우고‘풀의 정’상표를 등록하였습니다. 시어른의 제안으로 야채효소를 시작했지만 솔직히 저는 마음속으로 동의가 되지 않았었어요. 저는 참 농사꾼으로 살고 싶어서 시골에 시집을 왔는데 가공식품을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하니 겉으로 반대는 못하고 시어른과 남편이 하는 일에 마지못해 함께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의성군민신문


편리한 생활과 성공을 위해 도시에서의 삶을 지향하는 시절에 농사
꾼이 되고 싶다는 것은 천연기념물만큼이나 보기 힘든 생각인데 어떻
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고령군 쌍림면에 있는 평범한 농가에서 4녀 1남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근처에 있는 사기그릇 공장에 다니시고 농사와 관련된 소일거리는 할머니와 제가 많이 했어요. 우리 집은 땅콩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수확 철이 되면 저녁마다 할머니와 땅콩 까는 일을 했어요. 저는 일이 힘들거나 지겹다는 생각보다는 할머니께서 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땅콩 까는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또 거지들이 동냥을 오면 쌀을 바가지 가득 퍼 주곤 했는데 농사지은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엄마는 애써 농사지은 것을 막 퍼준다고 꾸중을 하셨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나중에 시골로 시집가서 농사지은 것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것이라며 엄마에게 대들곤 했어요. 엄마는 청개구리처럼 지 고집대로 한다고 속상해 하시곤 했죠.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 농사꾼으로 살아야겠다는 굳은 다짐은 없었지만 시골의 정겨움과 농사짓는 자체가 좋아 자연스럽게 농촌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고령군 쌍림면이 농촌이기는 하지만 교통도 좋고 주변에 돈을 벌 수있는 곳이 많아 다른 시골과 달리 살기 넉넉한 곳인데 어떻게 의성에서도 오지인 춘산면 효선리에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까?

시고모님이 이웃 마을에 살면서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라 친정 엄마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혼기가 차니 친정 조카인 남편을 저에게 소개 해 주셨어요. 1990년 1월 28일 처음 만났는데 첫눈에 서로가 오케이해서 결혼 날짜를 바로 잡았습니다. 결혼을 한다고 하니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저를 불러요. 목사님께서는 시어른이 되실 김영원장로님(故 김영원 장로님은 1978년 농약 중독을 경험하신 후 유기농과 농민의 권익보장을 위한 활동을 시작으로 정농회 전국회장, 기독교농민회 총연합회 회장, 우리 농산물 먹기 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 등을 역임하신 농민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다.)과는 기독교농민회 활동을 통해 잘 아시는 사이라며 그 어른이 보통 깐깐한 어른이 아닌데 그런 집에 시집을 간다고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구요. 결혼식은 5월 5일 의성에서 했는데 결혼식에 오신 친정 마을 사람들이 촌구석으로 시집을 간다고 말이 많았습니다. 친정 엄마가 결혼식을 마치고 시댁에 데려다 주고 가셨는데 골짜기 중에 상 골짜기라고 많이 울면서 가셨어요. 저는 원하는 삶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친정 부모님과 친정 마을 분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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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원했던 농사꾼의 삶을 살기위해 효선리로 시집을 오셨
는데 현실적인 시골생활은 어땠나요? 혹시 일이 힘들거나 남편과 부
부싸움 등으로 가출을 시도해 본 적은 없었습니까?

 사실은 제가 가출을 딱 두 번 했었습니다.
신혼 초에 시어른과 따로 떨어져 살았었는데 남편과 사소한 기 싸움으로 크게 다투고는 남편 몰래 짐을 싸 들고 시댁으로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지혜롭게 가출을 한 것 같아요. 남편은 시어머니와 전화통화로 제가 시댁에 있는 것을 삼일 만에 알게 되었는데 오만 걱정과 달리 집나간 마누라가 부모님 농사를 돕고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겠어요. 화를 내기 보다는 오히려 좋아해요. 덕분에 사이도 좋아졌습니다.
 두 번째 가출은 2003년 제가 효선리 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시어른과 남편은 당신들께서 이루고 싶은 농촌을 만들기 위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부녀회장을 맡게 되니 바깥 활동이 늘어나게 되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저의 바깥 활동을 싫어하며 집에 붙잡아 두려고 했어요. 그날 마늘쫑을 뽑는 날이었는데 남편에게 면에 있는 부녀회 모임 때문에 다녀오겠다고 하니 무턱대고 반대를 해요. 자기는 농사일을 나에게 맡겨놓고 밖으로 자주 다니면서 나는 어쩌다 나가는 부녀회 공식 모임에도 못나가게 하니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통장을 들고 가출을 해 버렸어요. 막상 가출을 하니 갈 때가 없더라구요. 고민 끝에 교회에서 봉사를 하러 간 적이 있는 안동 길안에 있는 시설‘행복의 집’을 찾아 갔습니다. 원장사모님이 고생을 했던 시집살이 이야기를 들려 주시며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근육이 없어 평생 누워서 생활해야 하는 10살짜리‘찬인’이라는 아이가 누나가 좋다며 함께 살자라는 말을 계속 해요. 그날 밤에 참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원장님 사모님이 겪었던 고된 시집살이와 평생 누워서 지내야 하는 찬인이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비하면 고된 시집살이도 고통의 삶도 없는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고작 바깥활동 못 나가게 하는 남편 말을 참지 못하고 가출을 했으니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은혜를 가득 안고 집에 들어가니 남편이 저를 보자마자 당장 이혼을 하자고 해요. 들고 나간 통장 돈을 다 쓸까봐 비밀번호도 다 바꾸어 놓았더라구요. 아버님께서 아들 내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아시고는 저를 불러 이유를 물어 보시기에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님이 아들을 불러 꾸중을 크게 하셨어요. 남편이 무릎을 꿇고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시어른께 용서를 빌면서 두 번째 가출사건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남편은 그때부터 저에게 배려를 많이 해 주었고 둘 사이도 너무 좋아지게 되었어요. 바깥 활동 하지 말라고 할 때는 나가고 싶었는데 막상 바깥 활동을 하라고 하니 나가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효선농산 일도 바빠지면서 집안일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 의성군민신문


이야기가 재미있다 보니 야채효소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발효음료와 관련된 전문적인 교육과정이 많지만 당시로서는 제대로 된 정보나 체계적인 교육과정이 없어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은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초기에는 발효음료에 대한 경험이 없다보니 모든 과정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특히 발효 기간이 일 년 이상 지나야 가스가 거의 발생되지 않는데 당시에는 그런 것을 몰라 몇 달만 발효시키고 투명 플라스틱 병에 넣어 팔았는데 가스 때문에 부풀어 올라 병 모양이 대부분 짱구였습니다. 가스가 찬 병을 처음 개봉할 때 흔들린 콜라병처럼‘펑’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갑자기 쏟아져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고무대야를 거꾸로 해서 그 속에서 열어야 한다는 유의사항을 꼭 전달해야 했습니다. 지금 시대면 난리가 나겠지만 당시에는 소비자들이 착해서 발효음료를 마시려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불편으로 받아들였어요. 저희 집에서 판매 한 것이 딱 한번 폭발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친정 여동생 신혼 방에서 폭발을 해서 신혼살림들을 엉망으로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나마 친정 동생이었기에 다행이지 일반소비자였다면 보상금이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힘들고 아찔한 경험들
이었지만 덕분에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시켜 준 과정이기도 합니다.

지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효선 농산에서 생산하는 ‘풀의 정’이 미국에도 수출되고 도시 소비자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1996년 효선농장을 설립하고 이듬해 IMF가 터졌습니다. 1998년까지는 힘들었지만 1999년부터 팔리기 시작하더니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도 하고 2005년, 2006년에는 미국에 수출도 하였습니다. 최고 많이 팔린 해는 2007년으로 1.1리터 병으로 9,000병을 판매했습니다. 한 병에 소비자 가격이 3만원이니 2억 7천만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2014년 현재는 판매량이 3,000병 수준으로 급감을 했습니다.

매출이 반 토막도 아니고 삼분의 일로 줄어들어 경영에도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 때 잘 나가던 발효음료 시장이 위축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발효음료가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우리나라에 퍼질 때 생산량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한마디로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인기를 끌자 후발주자들이 대형설비를 갖추어 발효음료 시장에 뛰어들었고 최근에는 설탕 품귀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일반 가정집에서도 유행처럼 만들기 시작하면서 공급과잉을 불러 왔습니다. 또하나 결정적인 것은 얼마 전 모 TV방송에서 발효음료는 사람 몸에 유익한 효모나 유산균이 없는 설탕 덩어리라고 단정을 하는 바람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습니다. 대형설비에서의 생산량과 가정에서의 생산량이 많아지다 보니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발효음료가 만들어 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처럼 정부가 정한 식품공전에 따라 관계기관의 검사를 받고 기준치 230배 이상의 효모수, 25배의 비타민이 포함되어 있는 양질을 발효음료를 만드는 생산농가로서 너무 억울했습니다. 식품공전에 의하면 발효음료는 유산균음료, 효모음료, 기타발효음료로 나
누어지는데 야채효소의 경우는 유산균음료가 아니기 때문에 유산균의수가 기준치 보다 낮은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을 모르는 일반 국민에게 유산균
수가 기준치 보다 낮다고 해버리면 밀가루가 주재료인 빵을 놓고 쌀 성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효선농산에서 생산한‘풀의 정’을 가지고 정말 설탕 덩어리인지 아니면 몸에 유익한 효소음료인지 그 전문가와 공개 검증을 방송에서 해 보고 싶습니다. 기준치에 미달되는 제품의 문제 제기는 국
민의 알 권리를 위해 당연하지만 부분적인 것으로 발효음료 전체를 매도하는 일은 신중하지 못한 방송이었다고 봅니다. 정확한 조사와 검증이 없는 방송 때문에 생존에 위협을 받는 수많은 피해자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억울함이 해소되어 효선농산에서 생산하는풀의 정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많이 공급되었으면 합니다. 어떤 분들에게 발효음료가 도움이 되는지요?

피로감, 의욕상실, 소화불량 때문에 병원에 가
서 검진을 받으면 아무 이상이 없는 반 건강 상태의 사람, 변비에 시달
리는 사람, 숙취해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단, 건
강한 발효음료를 마셨을 때 효과가 있습니다.
ⓒ 의성군민신문


끝으로 앞으로 하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씀 해 주시죠?

지금은 바람이 불어 시장이 흔들리고 있지만 20년 동안 그러했듯이 건강한 야채효소를 계속 만들어 발효음료의 효과를 증명하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항아리로 전해졌던 엄마의 손맛을 살리고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 장류는 아직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손으로 직접 만들어 주시는 어머니들께서 돌아가시면 전통장류 문화는 사라지게 됩니다. 최근에는 양가 어머니가 다 돌아가신 친구들에게 직접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부탁 전화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저도 50입니다. 아직 전통장류를 만들어 주시는 어머님들이 살아계실 때 제대로 배워서 항아리를 통해 엄마에서 엄마로 전해 진 우리나라 고유의 손맛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효선농산에서 생산하는 야채효소‘풀의 정’상자에는 1980년대 후반 김영원 장로님의 사랑채에 기거했던 인연으로 판화가 이철수씨가 만들어 준 판화그림과 글이 있다. [잡초라 부르는 것조차 모두 아름답다.세상에 시시한 인생은 없다. 어디에도‘잡초인생’철수...]
비록 한 포기의 잡초로 태어났지만 발효의 과정을 통해 사람에게 유익한 음료로 다시 태어났듯이 사람도 지역과 사회를 위한 유익한 존재가 되기 위해 발효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 각성의 귀한 만남이었다.

                                        [인터뷰 2014. 11. 14 체험놀이창작연구소장 송종대]
의성군민신문 기자  muk45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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